거룩하신 하나님-양장
데이비드 웰스의 '거룩하신 하나님' 현대의 문화는 개인과 사회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변화시켰다. 개인의 변화는 사회를 변화시키며 현대성에 물든 사회의 변화는 교회를 압박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웰스는 본서에서 현대화와 현대성으로 인해 발생되어지는 하나님관의 변화를 다루고 있다. “현대화는 삶의 외부 구조를 변화시키고, 현대성은 현대화된 세계 환경에 등장하는 가치와 의미(현 상황에서 대체로 정상적이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가치와 의미)를 변화시킨다.” 웰스에 의하면 현대화 과정은 주로 자본주의, 기술, 도시화, 정보통신이라는 중요한 네 가지 실재에 따라 이루어진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도시로 끌어들였다. 그 결과 “우리가 사는 세계의 외양은 물론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 생활 장소, 일을 경험하는 방식 등에 영향을 주었고, 사회 영역에 적응하고 성공하기 위해 우리가 지닌 가치와 기대마저 변모시키고 있다.” 기술은 가장 효율적인 것이 가장 윤리적이라고 믿는 태도를 안겨주었으며, 도시화는 새로운 다문화 환경을 제공하므로 “세속적인 세계주의, 다원주의, 상호 관용,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고 고유한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며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개인 영역 등을 위한 강력한 요구를 일으켜 왔다”라고 웰스는 말하고 있다. 이처럼 현대화된 세상은 현대화된 문화를 만들어낸다. 자아중심의 현대화는 자아중심의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공 영역에서 신의 자리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웰스는 그 특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관료주의, 생산체계, 자본주의 조직, 라디오, TV가 쉴 새 없이 쏟아 내는 달콤한 사탕발림에 빠져든 공공 영역은 신이 의미 있는 대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다. 신이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으나, 여기 공공 영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한 개인의 영혼에 자리잡고 그의 사사로운 직관 속에 침잠되어 있을 수 있으나, 상업과 대인 관계에서 차지할 자리는 전혀 없다. 기계화된 세계, 급속히 성장하고 다양하게 분화된 도시는 사실상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관심을 인정하지 않고 은혜를 찾지 않고 용서도 구하지 않는 사회적인 특징을 보인다. 현대 사회는 다원주의야말로 이 어색한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해법이라고 기대한다. 만약 시민들이 원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라면, 그들이 한 개인으로서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심 갖게 하라. 하지만 세계의 나머지 부분은 초자연적이고 도덕적인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선포에 구애받지 않게 내버려 두라.” p. 27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한데 모인 도시화는 다원주의가 깊숙이 뿌리내리게 되었으며 신의 영역은 개인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공공영역에서는 “초자연적이고 도덕적인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선포에 구애받지 않게 내버려 두라”고 요구한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화의 모든 부분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현대화된 세계가 우리에게 수많은 유익을 준 것은 틀림없다. 웰스는 현대화가 “작은 마을의 지역주의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우리의 눈을 세계로 돌리게 하고 전 세계 모든 지역 사람들과 우리를 연결시켜 주었으며, 기술 개발로 인해 우리는 더 안전하고 훨씬 생산적인 방식으로 더 편리한 세상을 만들어 왔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평균 수명을 거의 두 배 가까이 연장시켰으며, “권리를 신장하고 교육의 기회를 넓히고 더 큰 소망을 북돋우고 풍요를 누리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현대화는 우리에게 아픔을 안겨주었다. 삶을 각박하게 만들었으며, “가정을 붕괴시키고, 아이들에게서 순수함을 빼앗고, 윤리적인 가치를 희석시키고,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판단력을 상실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웰스는 현대화의 가장 흥미로운 사실로 ‘죽음의 순간에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켰다는 점’을 꼽고 있다. 그는 살렘 저녁 뉴스(Salem Evening News)가 1786년에서 1990년 사이에 실린 부고 기사를 분석해 발표한 것을 가지고 이에 대해 논증한다. 그 분석 발표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사실은 고인의 인품을 중요시 한 사회가 고인의 생업을 중요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 사람을 식별하는 주요 수단이 바뀐 것이다. 또한 “19세기 초에는 대다수 부고 기사가 종교적인 표현을 사용했는데, 특히 상당수는 기독교적인 색체를 띠었으며, 20세기 초로 접어들면서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현상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웰스는 이것이 “미국의 사회생활이 세속화된 현상과 부합된” 결과라고 본다. 이처럼 세상은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 만물을 바라본다.” 자아가 좋다라면 그것이 곧 선이다. 세상은 자아를 만족시키기 위해 원하는 것을 제공하고자 동분서주(東奔西走) 한다. 이러한 현대성의 문화는 오늘날의 교회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웰스는 4장에서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소비주의 문화의 일면, 곧 마케팅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있다. 교회는 자아를 기분 좋게 해주어야 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아중심이 되었으며, 그 결과 하나님관이 변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의 특징적인 표시는 하나님이 이제 더 이상 무겁지 않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개인이 정한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교회는 소비자가 왕이 되므로 하나님은 아부하는 분이 되고 말았다. 현대성은 이처럼 하나님을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웰스는 “현대성이 하나님을 무의미하게 만든 탓에, 하나님의 거룩함은 다른 성품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해진다”라고 하였으며, 타락한 인간은 선을 싫어하므로 거룩하게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냉담하다고 말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가장 먼저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그분의 거룩함은 약화되었다. 사랑의 하나님만으로도 “충분한 신학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기독교를 경박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다. 그분은 “완전한 정결함이요, 비교할 수 없는 선함이요, 모든 옳고 바른 것의 척도요, 모든 그릇되고 사악하고 해로운 것에 대한 최종 저항선”이시다. 그분은 스스로 거룩한 자로 계시하셨다. “하나님이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실 때, 하나님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처음으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출 3:5~6). 이렇게 하나님은 스스로를 거룩한 자로 나타내셨다.” 모세는 거룩한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웰스는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신중한 자들이였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현대의 복음주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행하고(미 6:8), 도덕적으로 신중하며, 경건한 마음, 곧,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바른 경외심”(시 111:10; 잠 1:7; 욥 28:28)을 보이려는 마음이 있다. 왜 그럴까? 그리고 구약 성경에서 이 지식이 심령을 정확히 감찰하고 삶을 정하고 생각과 존재와 행위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인정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pp. 206-7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회복하여야 한다.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거룩한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우리는 참을성 많고 친절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잘못된 것에 저항하거나 심판할 뜻이 없고 그것을 소멸시킬 힘도 없는 하나님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한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또 하나의 우상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오로지’하나님께 성실하라는 요구를 담고 있다.” 웰스는 호세아 선지자의 계시대로, 거룩하신 하나님은 어떤 경쟁자도 용납하지 않는 연인의 강렬하고 완전한 열정으로 사랑하시는 까닭에,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게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용납하지 않으신다고 하는 진리를 오늘날의 복음주의 교회를 향해 일침을 가하고 있다. 교회는 이제 자신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웰스가 지적하듯 “종교적인 소비자들의 입맞에 맞는 대형 마트가 되려는 계획을 중단해야 한다.” 교회는 문화와 그리스도가 이루는 대조를 명확히 볼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기꺼이 행”하도록 신학이 회복되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의 마케팅 방법을 모방해서는 안된다. “상투적인 예배 유형, 너무 지루한 교회 음악, 너무 미비한 프로그램, 너무 부족한 주차 공간, 너무 훈계적인 설교”등이 교회를 약하게 만든 것이 아니다. 세상의 방법은 “행정, 조직, 스타일, 안락함” 등이 문제라고 하나 성경은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웰스의 책은 미국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쓴 책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독자들이 읽기에는 다소 까다롭다. 미국의 상황을 전개하고 그에 대한 대응책과 치료책을 제시하므로 한국의 독자들은 그의 글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고의 지겨움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또한 책 내용 중 불필요하게 덧붙여진 부분들이 눈에 띈다. 본서를 좀 더 간략하게 썼더라면 그리고 좀 더 명확하고 분명하게 기술했더라면 더 좋은 효과를 가져왔을 텐데 라는 아쉬움을 가져본다. 그 이유는 웰스를 잘 이해하는 독자나 좋은 교육 환경을 받은 독자들 외에 평이한 독자들은 대부분 헤매게 될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굳이 먼 나라의 얘기 그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글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라고 나는 말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하나님관이 바뀌었다. 하나님은 복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시는 안정제이다. 그는 나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할 종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교회가 현대화와 현대성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그것이 교회를 압박한다. 신학이 실종된 한국 교회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다. 자아중심의 마케팅 방법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한국 교회의 실정에 비추어 볼 때 본서는 그만큼 읽을 가치가 있다고 보여 지기 때문이다. 방향을 잃고 헤매는 한국 교회의 뱃머리를 돌리고자 하는 이들에게 본서는 분명 좋은 지도의 역할을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