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복음주의
이안 머리의 글을 읽으면서 좋은 목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설령 목회자가 아니어도 내 가정과 내 주변에서 관계된 사람들과 신앙을 나누어야 할때 이안 머리처럼 균형잡힌 시각을 갖게 해주려고 노력하고 싶습니다. 이안 머리처럼 말하고 글을 쓰는것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많은 인내와 폭넓고 해박한 지식을 통해 자신의 믿음이 점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 시대의 문제점들이 무엇이고 그 핵심이 무엇이며 필요없는것에 부속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관점들이 무엇인지 다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난 이안 머리가 좋은 목자라고 생각됩니다. 아버지 같은 심정이 다가오기 때문이죠. 공부를 많이 해도 이런 자세가 늘 내 곁에 있길 소망해 봅니다. 오래된 복음주의에서 다루는 것은 복음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복음주의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이해하게 해줍니다. 현재에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구원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목사님들의 설교가 어떠한지 검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에 대해서 역사상 가장 잘 이해하고 발전시킨 부류가 청교도임을 말하면서 이 책의 목적도 청교도 서적을 읽어야 한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율법설교가 왜 필요한지 언급하며, 스펄젼을 통해 회심과 거듭남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해 줍니다. 단번에 이루어지는 거듭남,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회심과 성화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며 구원에 대해 총체적으로 알아야 오류에 빠지지 않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교회는 이런것에 대해 교리적으로 중요시 여기지 않고 죄의식과 거듭남의 의미도 많이 퇴색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 칭의와 그분의 순종과 죽음으로 말미암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사랑에 대한 개념을 언급합니다. 일반적인 사랑과 특수한 사랑의 구분을 말하고 역사적으로 이 두개념이 논쟁속에 있었음을 말합니다. 특히 웨슬리가 칼빈주의 몇몇이나 웨슬리 당시의 교회의 모습을 통해 칼빈주의를 일반적인 사랑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는 부류처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웨슬리 당시 협회의 수준은 상당히 높은수준이라고 언급하면서 아르미니우스라는 단어의 개념으로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는 현재의 모습에서 단점을 지적하고 칼빈주의라는 의미에서 두가지 의미를 갖는 이런 모습으로 인해서 역사적 사건들을 오해하는 오류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인간 자체가 오류가 있는 존재임을 항상 기억하며 역사를 대해야 함을 인식시켜줍니다. 그러나 웨슬리에게 배워야 할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가지고 설교를 해야 하며 그 사랑으로 성도의 상태와 때에 맞추어 설교하는 것이 목회자에게 중요함을 인식시켜줍니다. 그리고 웨슬리는 네덜란드의 아르미니우스주의와 같은 신학노선을 가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웨슬리의 오해만 아니었으면 웨슬리와 칼빈주의는 서로 더 공존해서 있을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칼빈주의도 무미건조하지 않고 일반적인 사랑과 특수한 사랑 모두를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청교도들의 헌신 특히 조지 휘필드를 통해서 볼수가 있지요. 확신교리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가지 근거 하나는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선한마음 즉 예수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어 성도가 변화되는 것을 두고 말하는 순종하는 삶입니다. 즉 1~4장까지 말한 믿음에 대한 전체적인 것이 첫번째 근거라면 두번째는 성도의 삶에서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이 두가지와 성령에 의한 다른 한가지 근거가 논쟁거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감정적인 느낌을 갖는 특성을 말하는데, 이것이 모든 크리스찬에게 있는것인 아니라고 하는데 그것은 믿음 자체와 변화된 삶이 근거가 되면 그 변화는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아 성도의 의지와 감정이 함께 동반하여 변화를 갖기에 감정적인 뜨거운 느낌만이 참된 확신이라고 말하는것은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에게는 그런 특별한 확신으로 교회에 덕이 되는 삶을 사는 부류가 있음을 언급합니다. 이 책에서 백미는 마지막 장에 나오는 "포용성"입니다. 조지 휘필드와 웨슬리의 포용애 대해 언급하며,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다른 부분에 대해서 서로의 입장을 포용해주며 자신의 길을 가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모든 단체가 외부적으로 하나가 되는것이 참된 포용이 아니라 참된 믿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세계를 사랑하며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산다면 이것으로 연합은 더 잘될거라 말합니다. 그래서 크리스쳔의 연합과 교회의 연합에 대해서 구별을 짓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날 교회의 연합이 복음으로 인한 연합이 아닌 외부적인 연합 즉 두 단체가 하나의 단체로 모인것을 의미로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리자체가 죄로 발생할수 있으나 분리된것이 더 성경적일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사랑을 가지고 영혼을 사랑한다면 이것만큼 참된 연합을 없을거라 말합니다. 그래서 복음에 대해 바르게 아는것이 시급함을 말하는것 같습니다. 이 복음에 대한 문제가 다시 대두되어 종교개혁자와 같은 삶을 살게 되길 이안 머리를 꿈꾸고 있습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읽으며 이런 고민을 한적이 있었는데 복음에 대한 주제로 다시 고민하니 나도 다시금 믿음에 대해 현재의 이해와 개혁을 이루어 내며 그것이 교회의 연합과 건강성으로 나타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계속 고민하게 됩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나에게 주어진 삶을 살며 이 시대의 특성을 이해하고 현재에도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진정한 개혁이 무엇인지 고민해 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내 삶을 검토하고 공부하는데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힘을 내어 달려가고 싶습니다. 내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