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된 복음주의
나는 “분열된 복음주의”를 두 번 읽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안 머리의 메시지를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는데, 나는 그의 문제제기와 더불어 그의 신학적 입장을 지지한다. 이안 머리는 에큐메니컬 운동과 성경의 무오성 문제, 그리고 복음주의와 가톨릭 연합 문제로 일어난 분열을 성경적, 16세기 종교개혁자들, 18세기 대각성 운동 지지자들의 사상을 끌어다가 자신의 입장을 논증한다. 에큐메니컬 운동을 논함에 있어 이안 머리는 빌리 그레이엄을 비중있게 다룬다. 그에 의하면 빌리 그레이엄은 “초기만 해도 자유주의 신학이 침투된 기성 교단과의 협력은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1957년 뉴욕 맨해튼에서의 집회는 비복음주의자들의 후원을 처음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신학을 가졌다 해도, 함께 전도 집회를 통해 그리스도가 구원의 길임을 선포하기 원한다면 모두 환영한다.”고 말하였다. 그레이엄을 더 포용적이 되도록 이끈 가장 큰 원인은 1954년 런던 전도 집회 사건이었다. 그는 런던 전도 집회를 통해 비복음주의적인 목사들로부터 상상도 못했던 전도에 대한 관심이 터져나온 것을 보며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를 경계하던 주류 교회도 성경적 기독교에 끌려올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결국 성공이 그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비복음적인 교단들과도 협력할 수 있다는 실용주의가 결국 복음주의 교리를 훼손하게 만들었다. 로이드 존스 목사가 에큐메니컬 운동을 반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경의 근본 진리를 부정하는 이들을 과연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바울의 복음을 전혀 따르지 않는 자들과의 협력이 마땅한가? 로이드 존스는 “신앙의 핵심에 대해 180도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 한 교회를 이룰 수”없다고 말한다. “성경은 성공으로 진리 여부를 가리지 않는다.” 쉐퍼의 말대로 “순결한 삶과 바른 신학으로 인도하지 않는 전도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걱정하며 다가가지 않는 굳은 정통주의 만큼, 심각한 문제가 있다.” 복음주의자는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지어진 것으로 무오하며, 모든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것으로 믿고 고백한다. 오켄가는 성경관이 “보수 신학과 자유 신학을 나누는 ‘분수령’”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성경의 무오성을 믿던 복음주의자들의 성경관이 변하기 시작했다. ‘성경 우상주의’에 빠졌다는 비판, 성경의 무오성은 학문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비판에 대해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이 모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크 놀은 “성경무오설의 교리를 너무 고집하는 태도는 포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포기해야만 사고의 생명력을 제대로 발휘 할 기회가 생긴다.”고 하였으며, 알리스터 맥그래스 역시 “성경무오설에 대해 입장을 바꾸면, ‘학계 안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고, 이에 걸맞은 위상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복음주의는 오늘날 지식인들도 진지하게 대할 만한 학적 수준을 인정받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하지만 성경이 무오하다는 믿음이 학문성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무오성을 믿어도 본문을 이해하고 바른 해석을 위해 “성경 외의 자료를 사용하고, 배경을 연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안 머리는 “성경이 일부만 영감으로 적혔고, 일부만 신뢰할 수 있다면, 성경의 어느 부분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지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제기를 한다. 확실한 구분선이 가능할까? 학자들이 그어 놓은 구분선은 계속해서 변하지 않았는가? “여기에 유일한 대안은 성경 전체를 진리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전체에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구프린스턴 신학자 워필드는 “온전한 축자영감설과 영감을 완전히 부정하는 입장 사이에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안 머리는 워필드의 견해를 인정함과 동시에 “성경의 완벽한 영감을 믿지 않으면 당연히 신실한 믿음도 포기된다.”고 말한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점점 흐릇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을 신뢰하도록 강조한다.” 이안 머리는 성경의 무오성을 포기한 이유를 현대 문화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지적 수준을 높이려고 노력하면서도,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대한 성경적 진리를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엇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상은 성경을 다루는데 있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수 없다. “죄에 빠진 세상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한다. 조셉 하트는 “신성한 그 한 장 한 장을 경외하라. 그 중 한 부분이라도 손상을 입히는 것은 눈이 멀고 어리석은 격정의 마음, 강퍅하고 교만한 마음이 하는 일이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복음주의와 가톨릭 연합 문제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가톨릭을 우리의 형제자매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종교개혁자들의 노선을 취해야 할까?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진리에 벗어난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은 ‘진리 안에서’ 하나 되기를 원하신다. 교회관과 구원관이 다른 가톨릭과의 연합은 불가능하다. “성경은 잘못된 신학을 노골적인 불신앙보다 더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다.” 사도들과 종교개혁자들은 잘못된 가르침을 용납하지 않았다. 호레이셔스 보나는 “신앙과 불신앙 간의 교제는 조만간 신앙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였다. “성령께서 같이하지 않는 교제는 신앙을 반드시 약화”시킨다. 이안 머리는 “성경적 원리를 우선으로 하지 않는 연합 활동은, 반드시 하나님의 영을 슬프게 만들고, 영적 빈곤 상태로 몰아간다”고 말하였다. 본서는 평신도들이 읽기에는 부담스럽다. 미국과 영국의 기독교 역사를 다룸에 있어서 복음주의와, 신복음주의, 그리고 영국 성공회와 가톨릭과의 신학적 차이를 논하기 때문이다. 신학적 훈련이 적을 수밖에 없는 평신도들에게는 여러 신학자들의 견해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독서를 점점 힘들게 만들 것이며, 지루함과의 싸움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 책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나는 이안 머리의 책을 통해 우리의 신학과 신앙이 종교개혁자들처럼 확고하지 않으면 조그마한 틈이 결국 근본적인 문제까지 뒤틀려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작은 구멍이 전부를 무너트린다. 종교개혁자들의 원리를 철저하게 지키며, 가톨릭 교회의 잘못된 신학과 싸워야 한다. 성령께서 같이하지 않는 교제는 하나님의 영을 슬프게 만들고, 영적 빈곤 상태로 몰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진리 안에서 협력하며 진리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한다는 사실 역시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