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된 복음주의
이안 머리의 [분열된 복음주의] 저서는 결코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그가 사용한 20세기 복음주의 지도자들의 방대한 인용문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신학의 관문을 통과하는 느낌을 받게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저서는 결코 우리가 무시하고 넘어가서는 안 되는 해 답을 주고 있다. 그는 많은 복음주의 지도자들의 말과 글들을 이 책에 기록해 놓음으로 인 해 생생한 증거자료를 우리에게 제시해주며 그리하여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며, 또한 우리가 앞으로 지켜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확신에 찬 목소리로 알려주고 있다. 그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회복과 참 교회의 정체성의 회복”이다. “성경이 말하는 참 그리스도인은 누구인지, 성경적 교회관이 무엇인지”를 말하며 그 문제로 인해 어떻게 복음이 분열되어 왔는지를 말해준다. 이안머리는 20세기 후반 교계나 학계 지도자들의 ‘에큐메니컬 운동의 문제점’, ‘성경의 무오성 논쟁’, ‘복음주의와 카톨릭의 연합 문제로 인한 분열’ 등을 이 책에 다루며 복음주의가 왜 분열될 수밖에 없었는지의 이유와 과정과 결과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슐라이 마이허의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으로 종교는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느낌, 직관, 경험의 문제라고 주장, 여기에 영향을 받아 많은 교회가 이성주의 포로가 되었다. 그에게 종교는 잘 정리된 논리와 경건의 경험을 의미했다. 자유신학을 반대한 메이첸은 프린스턴 신학교를 떠나 ‘순수 장로 교단’을 세우게 된다. 이것이 정통 장로 교단이다. 그러나 메이첸을 따르던 구 장로교 신학은 신종 신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근본주의 문화 사이의 간격으로 또 한 번의 교단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방향에 만족하지 못한 오켄가와 카넬은 같은 비젼을 가지고 플러 신학교를 세우게 되고, 이곳에서 제시된 새로운 비젼이 ‘신복음주의’이다. 플러 신학교는 근본주의자들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보다 포용적이다.오켄가와 카넬은 새로운 복음주의 문화를 만들기를 원했다. 이 ‘신 복음주의’로 인해 새롭게 탄생하는 인물이 ‘빌리 그레이엄’ 이다. ‘빌리 그레이엄’은 초기 사역에는 자유주의 신학과의 협력을 거부했지만, 주류 교단 지도층과 전도 집회를 같이 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논리를 실현시킬 수 없음을 알고, 1957년 ‘뉴욕 전도 집회’ 때 자유주의자와 협력하게 된다, 그레이엄을 더 포용적이 되도록 이끈 집회는 1954년 런던 전도 집회로 그를 세계무대에 알리는 기회가 된다. 런던 집회는 복음주의 연맹이었고 성공회와 모든 주요교단에서 후원을 거부했지만 다수의 목사들과 기성 교단들이 상상도 못했던 전도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것을 보면서 그레이엄은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를 경계하던 주류 교회도 성경적 기독교에 끌려올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성공적인 집회는 성경의 원칙을 대신하는 실용주의적 전도방식으로 흐르게 된다. 군중 동원을 크게 의존했고, 참석자의 수를 유지하고 증가시키기 위해 유명인사와 친해지려고 노력하게 되고, 정치 지도자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극단에 빠지고 말았다.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그레이엄의 생각은 옳았지만 그가 보여준 포용주의와 관용은 동시에 큰 약점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경험을 나눌 수 있다면 신학적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사상을 받아들인 것이다.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우선주의가 만든 비극은 ‘종교적 성공을 위한 광신적인 노력’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에큐메니컬운동에 대하여 유일하게 반대의 입을 연 사람이 로이드 존스 목사다. 로이드 존스는 성경관이 다른 기존 교단과의 관계보다는 같은 교리에 근거한 연합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성경이 정의하는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반박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성경적 연합을 우선순위로 주장하며, 복음주의가 원래 자리를 지키려면, 무엇보다도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움직이는 연합부터 추구해야 한다며 교제보다는 교리를 강조한다. 로이드 존스가 에큐메니컬 신학에 가장 거부감을 느꼈던 부분은 교단간의 연합니다. 교단들이 교회와 합쳐진다고 해서 교회 연합은 아니다. ‘교단’은 성경이 말하는 ‘교회’와 같은 뜻이 아니다. 교단은 성경적 진리의 특징 요소를 유지하기 위해 세워진 조직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우리를 진리와 소금이 되게 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무엇보다 하나가 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자신 있게 주장하는 것은 ‘교회’가 더 크게 하나 될수록, 세상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잇다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교회는 포용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사를 돌아봐도, 단순한 숫자적인 연합은 세상을 변화시킨 적이 없다. 이안 머리는 분열의 또 다른 원인으로 ‘성경의 무오성 논쟁’을 든다. 오켄가가 성경관은 보수 신학과 자유신학을 나누는 가장 핵심적인 잣대라고 말했던 것처럼 복음주의자들을 특징짓는 가장 핵심적인 잣대는 성경관 이었다. 그러나 성경의 무오성을 믿던 복음주의 학자들이 성경관이 변하기 시작했다. 복음주의자들은 신정통주의 칼 바르트가 성경의 ‘인간적인 측면’을 충분히 인정함으로써 학계의 인정을 받은 사실에 주목했다. 이런 상황은 복음주의의 심각한 방향 전환을 의미했다. 성경에서 신적 계시의 특징을 강조하지 않고 ‘인간적인 면’을 다룰 수 있다는 기대가 처음부터 잘못 되었다. 말씀 안에서 인간적 요소와 신적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이 두 가지는 따로 설명이 불가능할 만큼 결합되어 있다. 성경의 초자연적인 면을 뒤로 미루고 인간적인 요소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여기서 심각한 분열이 일어난다. 모두가 더 큰 학문적 혹은 에큐메니컬 운동을 위한 자유의 필요성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전적 무오성 포기의 결과로 성경이해에 있어서 전문 학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고, 신실한 믿음도 포기하는 현상이 일어났으며, 신학교의 신학교육은 목회자의 신앙을 더 풍성히 세우기보다는 다른 학문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같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마지막으로 이안 머리는 분열의 원인으로 ‘복음주의 가톨릭의 연합문제’를 말한다. 1970년대 종교계에서는 가톨릭교회와의 연합 논의가 가장 인기 있는 주제였고, 실제로 연합 활동이 늘면서 많은 진전이 있었다. 1977년 노팅험에서 열린 성공회 복음주의자 대회 선언문에서 “가톨릭 교인도 같은 그리스도인임을 깨닫게 되면서, 우리는 지금 까지 그 사실을 부인하듯이 행동했던 과거의 모습을 회개한다. 우리는 이제 두 교회 사이의 온전한 교제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복음주의자도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실제적인 연합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갑자기 가톨릭이 진짜 기독교인지를 의심하는 것은 옛 복음주의 특유의 불신과 불편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취급됐다. 이러한 입장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신 복음주의적인 신념 때문에 가능했다. 1970년대 이래로 수많은 가톨릭-개신교는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이들 교회간의 신학적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가톨릭은 주로 세례를 통해 은혜를 받고, 선행을 통해 이 은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선행에는 믿음, 고해성사, 회개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계속 받아들이는 것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들이 가르치는 성례를 통한 은혜, “그리스도가 성례에 실제로 함께하는 것을 담보하는” 제사장적인 성직자관, 무오성을 보장하는 사도적 계승 같은 중요한 핵심들은 가톨릭의 전체적인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는 전혀 손댈 수 없는 문제다. 여기에 타협은 허락되지 않았다. 또한 가톨릭 신학은 인본주의를 만들어낸 인간 이성에 의지하는 신학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로마 교회는 지금 이 사회의 문제의 원인이 된 사상을 공유한 집단으로 여러 형태의 불신앙과 결합하므로 성경을 붙들어야 할 시점에서 전체 방향을 흐리는 역할을 해왔다. 로마 가톨릭과 자유주의는 적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성경을 대적하는 면에서 같은 편이다. 로마 가톨릭과 손을 잡으려는 복음주의자들도 같은 오해에서 출발한다. 한 복음주의 성공회 지도자의 말이다. “자유주의와 싸우기 위해 성공회 가톨릭과 손을 잡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들이 주장하는 성례주의와 예식주의에 맞서는 전쟁을 시작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지금까지 이안 머리의 ‘분열된 복음주의’읽고 짧게 요약정리 하였습니다. 방대한 분량의 내용을 짧게 핵심적인 부분만 요약하려니 저자의 복음에 대한 열정을 많이 묘사하지 못한 듯 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부분이 저에게 낯설고 어렵게 다가왔지만, 인내하며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참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참 성경적 교회관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 번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바로 이해하여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무질서한 실용주의와 포용성의 문제를 되돌아보고, 사람의 인기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대로 바른 교리를 세우며 복음을 회복하는데 열심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가벼운 여럿의 멘토를 구하기보다 한 복음주의자의 저서는 우리를 바른길로 안내하기에 성경 다음으로 충분합니다. 탁월한 전기 작가이자 부흥역사가인 이안머리의 ‘분열된 복음주의’를 만나게 된 것은 저에게 또 하나의 소명의식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요즘‘ 예수님의 공의가 과연 무엇일까?’, ‘공의’라는 단어로 고심하는 저에게 이안머리의 이 저서는 저에게 해답을 주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위해 복음의 진리를 가볍게 했던 일들을 회개합니다. 복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소수의 사람들을 열정을 보며, 결코 복음은 가볍지 않고 넓은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님을 또 한 번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성을 주셨습니다. 평신도로서 조금 읽기가 힘들 수 있지만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