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실종 - 양장

양승****
2009-02-07
데이비드 웰스는 고든콘웰 역사신학, 조직신학 교수로써 문화신학을 작성하며 이번책의 그의 시리즈의 세번째 것이다. 그의 특징은 문화속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현실의 일을 교회가 어떻게 흡수해서 성경을 버리고 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이런 세밀한 분석과 작업은 지식이 풍부해야 하지만, 문화에 대한 통찰력이 있어야 가능할것이다. 사회의 여러 모습들에서 성경을 통해 분석하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내겐 실망스럽지가 않았다. 데이비드 웰스의 세번째 책 윤리실종 드디어 어느 핵심에 선 느낌이 든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완공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다. 데이비드 웰스는 자신의 관점을 지속하며 10년에 걸쳐 그의 글을 완성해가며 그의 글을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에 비유하고 있다. 그의 문화신학시리즈는 전통신학의 순서를 따르고 있으나 그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진행한다. 첫번째, 신학실종이 조직신학의 서론에 해당되고 두번째, 거룩하신 하나님이 신론 세번째, 윤리실종이 인간론에 해당된다. 그러나 인론을 다른 조직신학처럼 썼다면 나는 아마도 많은 실망을 가졌을것이다. 그렇다고 인론의 기본이 되는 것에 대해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것은 아니다. 포스트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티의 영향을 받은 현대인의 특성을 감안해서 작성했다. 그리고 윤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것은 조직신학에서 인간의 상태와 창조의 의미를 반드시 언급하는데 여기에도 그 이야기가 들어가는데 윤리적인것의 의미에 대한것을 이해해가면서 성경적인 윤리관을 회복하는것에 핵심을 두고 있다. 루터시대와 현시대를 구분하며 종교개혁시대와 현시대의 차이점과 유사성을 든다. 차이점은 문명의 발전과 자아중심적인 현대와 종교적인 세계였던 루터시대와의 차이성이 있고 자아중심적인 최초의 문명을 만들어낸 현대이다. 유사성은 말씀에 대해 자신이 없고 그리스도만으로 교회를 세울수 없다는 상황에 놓여있는 교회의 모습이다. 복음주의 두가지 영성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전통주의 영성과 포스트모더니즘 영성이다. 이 두가지의 구분이 모호해져가는 양상에 있다. 설교자의 설교가 성경적 개념과 포스트모더니즘 영성 사이에서 단어는 성경의 용어와 신학용어를 사용하고 그 의미와 뜻은 포스트 모더니즘 영성을 사용해서 성경의 진리를 옹호하는 느낌을 갖게 만들어 자신의 신학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런 설교는 tv만 켜면 쉴새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현대의 윤리관의 손상은 노골적이 되었고 덕목이 가치가 되어 명성이란 개념도 윤리를 지키고 도덕적으로 거룩한 개념에서 외모와 스타일 그리고 전문적인 능력에 맞추어져 가고 있다. 그래서 윤리관의 문제를 의식하기 보다 자아를 완벽하고 편하게 해주려는 것이 정당화되는 자세이며 그것을 부추키는 것은 해방심리치료와 광고업자들의 자세이다. 웰스가 말하듯 심리치료사와 광고업자가 구원자가 되어버렸다. 상품에 대한 구매는 인간의 허무속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의 감정을 소모해 버리는 대상이 되기에 잠시 허기진 자신의 감정을 물건으로 대체하여 그 구매속에서 인생의 철학과 삶의 철학을 담아 모든것이 완성된듯 자아속에 머물러 자신을 변신시킨다. 덕목이 사라진것은 덕목이 과거에 사용되던 의미와 현재의 의미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죄의식이라는 것에 대해서 수치심과 혼동하고 전혀 구분할수 없는 상황에 있다고 보며 수치심에 대한 것도 자아의 해석에 맞추어져 그전에 가졌던 공동체 속에서 형성된 공동관념이 사라지고 자아안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이런 현상은 교회속에서 들어와 죄의식에 대한 관념이 사라졌고 교회안에서 전혀보일수가 없게되어 로버트 슐러가 설교하는 자존감을 회복하는것이 중요하고 성도를 편안하게 자존감을 갖도록 만들어지는 개념으로 죄의식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된 상황이다. 교회에서의 설교에서 죄에 대한 바른 관념으로 설교하는것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복음의 의미와 구원관에 대해 교회가 모르거나 바르게 알지 않거나 알고 싶지 않거나 해서 성공적인 신학에 머물러 자신의 안위를 구하는 교황 레오 10세의 루터시대와 다를게 없다. 데이비드 웰스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인것을 인간의 딜레마속(창조와 죄와의 모순, 과거와 현재의 모순)에서 확인시켜준다. 교회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임을 선포해야 하고 타락으로 인해 죄로 물들어 회복할수 없어 매일 딜레마에 빠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 해결해야 함을 선포해야 한다고 웰스는 말한다. 그러나 현재는 그 십자가에 다가가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자아가 깨어져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마태복음 13:15) 현대의 특성이 자아중심성이 사라지면 현대세계의 문화에 뒤쳐지고 그속에서 빠져 나와버린것 같아서 십자가에 다가가서 변화되려 하지 않는다. 이건 교회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문화변혁을 하려기보단 현대의 문화속에서 벗어나기가 겁내하고 문화를 따라 교회를 이끌어 가려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상태가 손해보고 자신의 가치가 수준낮은 느낌이 들거나 문화에 젖어 전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개혁은 가능하다. 그렇다 왜?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외쳤던 루터의 종교개혁의 숨소리가 여전히 흘러 귓가에 부딛치기 때문이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 가슴에 박혀 실존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시기의 힘겨움속에서 복음과 성경을 바르게 선포하기 위해 외쳤던 선배들의 수고와 손길을 놓치 않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