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된 복음주의

양승****
2009-02-22
이안머리의 글을 읽으며 어느덧 그의 관점이 확연히 들어오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관점이 모두 나의 것이 되어버린것처럼 나의 관점이 그와 같음을 알게 된다. 시대를 이해하고 시대의 특성을 이해하는것은 성도에게 중요하다. 그럼, 내겐 무엇이 필요해서 현재가 과거를 이해하고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보게 하는가? 그건 바른신학과 믿음 없는 삶에 대한 통찰일것이다. 바른신학과 믿음이 우리에게 실재가 되어야 하는데 현재는 그것이 가상과 악세사리 수준에 머물게 만들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안머리의 분열된 복음주의는 그의 입장과 생각을 분명히 했다고 할수 있다. 분열된 복음주의는 이안머리의 색깔을 분명히 보여주는데, 그의 입장에서는 두세가지가 논의의 대상이 된다. 교회는 무엇인가?와 성경은 축자영감설에 의해 기록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들이다.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인과 연관되며 성경의 무오성은 진리의 체계를 지키는것과 관련된다. 그래서 교회가 진리를 버리거나 거짓된 가르침으로 세워갈때 역사는 그것이 어떤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이안머리는 이 책에서 그것을(20세기 중후반) 증명해간다. 책의 시작은 복음자와 복음주의에 대한 개념부터 시작한다. 종교개혁당시는 복음주의라는 말이 잘 사용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 당시 개신교는 모두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였다. 그러나 오래된 복음주의에서 보듯 웨슬리 시대에도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가 적음을 알수 있다. 이 책에서도 웨슬리와 휘필드의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그당시의 교회는 그들을 비난했다. 이유는 복음을 증거한다는것이며, 그 자체를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복음주의란 복음을 근거로 세워가는 교회이다. 종교개혁당시 지킨 복음을 지켜가는 교회가 복음주의 교회이다. 그리고 이 복음주의 교회의 양상이 변화되어지는것을 보여준다. 그 핵심의 시작은 슐라이어마허이다. 그는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계몽주의 시대에 태어나 계몽주의 산물로 물들어 정통적 신학을 이상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에게 믿음은 내용이 없는 종교적 감정만 가지면 되었다. 그래서 정통적 기독교의 틀은 말하지만 실제는 없는 자유주의 신학의 시초가 된다. 이런 영향은 독일과 유럽 그리고 영어권 교회들에게 영향이 파고들었다. 그 영향은 아마 한국교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것 같다. 빌리그레이엄은 전도집회를 시작했는데 그는 찰스피니의 구도좌석 부흥을 모방하여 숫자의 증가와 확실한 증거를 구원의 결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성공과 사람들의 운집은 자유주의, 근본주의, 가톨릭, 복음주의, 몰몬교등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끼쳤는데 그가 더 활동적으로 사역을 하게 한 인물은 풀러신학교를 창설한 오켄카이다. 오켄가와 카넬은 근본주의 영향을 받았으며 풀러신학교도 그 입장에 있었다. 이들과 빌리 그레이엄의 연합은 크리스챠니투데이 잡지를 만들고 대규모 집회를 형성해간다. 빌리 그레이엄은 헤링게이 집회를 통해 영국에 파장을 이끌었고 영국은 이런 영향에 의해 1967 키엘 대회를 향해 나아갔다. 키엘대회를 통해 복음주의는 분열 양상에 있었고 로이드 존스를 오해한 성공회 복음주의 자들로 인해 더욱 분열 양상이 분명해졌다. 이런 분열에 패커도 앞장섰는데 결국 패커는 1979년에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 그러나 패커는 미국에서도 에큐메니컬 운동에 서게 된다. 에큐메니컬 문제는 교회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발생한다. 에큐메니컬운동을 시도한 복음주의 자들은 분명히 말하지는 않으나 교회를 교단으로 보는 양상에 있었던것 같다. 그렇다고 그들이 교회의 의미인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변화된 성도들의 모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교단간의 연합을 통해 자유주의 자들을 물리치고 세속주의로 물든 현대의 문제를 해결할수 있을거라는 정치적 실용주의의 입장으로 나아갔다. 즉 관용이 앞서있는 지나친 포용에 있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복음을 통해 변화된 성도들의 모임이란 것을 등한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복음주의 자들도 자유주의의 영향을 따라 실용주의로 타협하면 그들이 변할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가톨릭과도 연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가톨릭은 복음을 듣고 변화되는 믿음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성례전이 있다. 그래서 구원얻는 방법은 다양하며 자신들의 공로가 중요했다. 그래서 가톨릭에는 구원의 확신이라는것이 없다. 그러나 개신교는 복음을 듣고 거듭난 성도에겐 분명히 확신을 가지게 되는데 말이다. 이런 극렬한 차이를 이겨낼수 있다고 생각한 에큐메니컬 운동은 오히려 그들의 믿음이 손상되고 성경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발생시킨다. 오히려 종교개혁운동을 분열을 조장한 무리처럼 보고 말았다. 이것은 진리를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놓고 있는 행동이다. 신학교계에서도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복음주의 신학계가 세상에서 지위를 확보하고 더 확장하려는 시도를 하려하는것이다. 그래서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고 싶은 입장이되었다. 이 입장은 미국에서는 풀러신학교에서 나오는데, 이런 영향들은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독일의 학제와 자유주의 신학적인 요소들도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래서 학문의 연구가 중요시되고 복음을 지키고 교회를 세우는 신학은 중요시 되지 않으며 가르치는것만 잘하면 된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F.F.Bruce) 여기에는 다른 요소가 발생한다. 학문적인 요구를 위해서 자유주의와도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 성경의 무오설을 부인해야 한다고 한다. 즉 유연하게 대처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열린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에 동참자는 맥그래스, 마크놀, 베빙턴등이 있다. 브루스는 그것의 시초라고 이안머리는 말한다. 성경무오설을 거부하면서 성경이 어느부분이 진리이고 어느부분이 그릇되었는지 설명해 주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비평학의 입장들에 맞추어서 성경은 난도질 당하게 된다. 기독교는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인가? 복음으로 변화된 성도들의 모임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한걸까? 이런것을 추진한 사람들도 그들의 열심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지나친 낙관주의의 관점으로 더 좋은 기회와 방향이 생겨난다고 여겼다. 결과는 오히려 복음주의가 손해를 보았다는것이며 그들은 그것을 헤아려 보질못했다. 우리도 이런 결과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교회는 이미 침투해 들어온 현대성의 영향은 복음을 말하기 보단 다른 관점들을 진행시키고 있는지 모른다. 성경을 의지해 현재를 이해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하기보단 다른것들이 더 중요해지거나 부차적인 것들이 핵심이 된 모습은 아닐까? 교회는 무엇인가?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곳이 아닌가? 맹목적인 전도에 급급한 입장에서 자신의 할일은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근본주의자의 모습은 내 주변에도 tv에도 안타갑게 나오고 있다. 복음을 바르게 아는것이 시급하다. 교회는 이것을 놓아서는 안된다. 현대성에 물든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복음을 더 분명하게 표현해야 하고 거짓것으로 덮고 있는것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