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하신 하나님-양장

권지****
2009-08-17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라. 권지성 David Wells의 God in the Wasteland(“거룩하신 하나님”)를 읽었다. 이 책은 1994년 초판이 Eerdman출판사에서 출간되었고, 한국어로는 2007년 “부흥과 개혁사”에서 출간되었다. 그의 전작 No Place for Truth(“신학실종”)에서 웰즈는 현대성이라는 우상이 어떠한 방식으로 교회에 침투하였으며, 어떻게 복음주의 교회에서 신학이 실종되었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제 본서에서 저자는 문화라는 옷을 입고 교회에 들어와 있는 세상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섭리의 교리를 회복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의 두 권의 책들은 전통적인 조직 신학적 접근이라기 보다는 절대적인 진리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 성경의 진리를 통해 문화들을 분석하고 해석함으로써, 비진리를 뚜렷히 구분할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 조직 신학자로서 웰즈의 탁월한 역량은 철저한 문화 해석학과 더불어 역사학, 사회학, 신학, 그리고 철학과 결합하여 현대성이라는 거대 우상에 물들어 버린 현대 미국 교회의 문제점을 진단, 분석하여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한다. 저자는 난잡한 시대의 정신과 포스트모던의 문화의 홍수 속에서 진리를 가장한 거짓 교사들의 속임수와 성공주의에 물든 탐욕이 판 치는 시대에 무엇이 참된 진리인지 모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본 저서에서 그는 세상성의 포로된 교회에 대한 해법으로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의 회귀를 부르짖고 있다. 웰즈의 말을 들어보자. “오늘날 복음주의 진영의 근본 문제는 기교가 미숙하다거나, 조직이 미흡하다거나, 음악이 유행에 뒤진다거나, 이런 결점들을 감추는 데 교회의 자원을 쓰려는 사람들이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지혈하는 데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이 아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진영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이 지나치게 불합리할 정도로 교회에 기대고 계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너무 멀고,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식상하고,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 자비롭고, 하나님의 복음은 너무 쉽고, 하나님의 메시아는 너무 평범하다.”(57) 책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2장에서는 현대 세계와 교회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20세기 지식 정보의 혁명과 끊임없는 생산과 번영의 추구로 우리의 물질적 풍요로움은 더해갔을지 모르나, 영적인 빈곤함, 공허함과 불안함으로 인해 미국인의 심령은 더욱 고갈되어 갔다고 말한다. 2장에서는 외형적으로 승리에 도취된 복음주의 교회들 속에서 신학이 사라져 가고 친목회와 시민종교의 모습을 닮아가는 모습을 진단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식에 봉착한 교회들의 해결책은 경영 테크닉이나 심리 치료나 심리학에 불과한 세상성들 이다. “과거 고백주의가 보여 준 관심이 복음주의 안에서 뚜렷한 퇴조를 보이고 있는데, 오늘날 복음주의는 부인할 수 없을 만큼 현대적인 경향에 따라 좌우되고 있다. 악을 질병처럼 다루는 치유 중심의 문화가 가장 각광 받는 곳이 바로 복음주의 진영이다.”(51-2) 3장 현대성과 세상의 본질(“The Alternative to God”)에서는 세상과 현대성과의 상호작용을 밝혀내고 있다. 웰즈가 말하는 신약성경의 “세상(kosmos)”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타락한 인류의 전체 삶의 영역을 가리키며, 결국,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인간 중심의 소비자 중심, 자본주의 문화, 성 문화 속에서 인류는 자신만의 만족감을 누리며 교회 역시 이러한 세상성에 대한 사랑을 키워왔으며, 이제 이 경계는 모호해 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세상성은 스스로를 성공한 기업가 정신, 기업이 주는 매력, 혹은 복음주의 활동을 홍보하는 데 필요한 훌륭한 통찰력인 양 뽐내면서 온화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다가온다.”(87)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는 예전에 볼 수 있던 교회와 사회 간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기독교가 차츰 “자아”운동으로 전락하고 믿음을 심리학으로 설명하고 기독교 신앙이 치유 위주의 문화에 순응하는 모습을 목격해 왔다. 현대 문화의 유혹에 넘어간 우리는 초월적인 성경 진리에 대한 초점을 잃어버렸다.”(92) 4장(“마케팅 기법으로 운영되는 교회”(Clerics Anonymous))에서는 교회가 받아들인 현대성의 흔적으로서 교회가 Marketing에의해 소비자들의 needs를 충족하기 위해 기발한 전략들을 개발해 사실들을 폭로한다. “치유 만능주의”와 “경영 혁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명을 부여 받은 교회가 이윤추구라는 기업의 최대 목적에 의해 개발된 tool을 교회의 교세 확장을 위해 사용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소비자의 심리와 수요의 법칙들을 발견하고 틈새 시장을 공략하며, 그들에게 종교적인 자부심과 정체성을 심어 줄 만한 효과적인 복음 상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식의 조지 바나의 주장을 우리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기업은 시장에서 제품을 판매하면 그만이다. 기업은 소비자들에게 제품에 대한 헌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반면에 교회는 그와 같은 헌신을 요구한다. 교회는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모든 삶에 대한 예수님의 주권을 선포하며, 진리인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적으로 굴복해야 한다고 선포한다.”(118) 최근 공개된 빌 하이벨즈가 담임 목사로 있는 윌로우 크릭 교회는 자신들의 그간 시행한 많은 구도자 열린 예배 및 프로그램, 그리고 전략들이 결국 신자들의 헌신된 제자의 삶, 그리고 경건 생활의 치열함이라는 측면에서 실패했음을 시인하였다. 이미 거대해 져 버린 이 교회가 100만불이 넘는 많은 자본을 투자하더라도 회심을 일으키는 것이성령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까지 얼마나 많은 프로그램과 조직력의 수정을 거쳐야 하는 것일까? 현재 많은 영적인 침체 속에 있는 한국의 중소 교회들은 탐욕적인 성공주의에 사로잡힌 채 윌로우 크릭과 같은 성공 신화를 꿈꾸고 있고, 무비판적으로 그들의 프로그램과 방법들을 모방하고 있다. 이미 실패했다고 시인한 그들의 고백 속에서 이제 한국 교회는 어떤 롤 모델을 다시 모방하기 시작할 것인가? 웰즈는 현재 성황중인 쇼핑몰과 같은 교회가 실용적 낙관주의에 빠져 있으며, 소비자들에게 그들의 내면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치유단체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고 역설한다. “테크닉이 진리를, 마케팅 활동이 사상을, 개인의 만족이 교회의 번영을 치유 중심의 세계관이 교리적인 통찰력을 대신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것이 통제 가능한 것으로, 유기체가 조직체로, 말씀 선포자가 조직 경영자로 영적인 것들이 물질적인 것들로 대체된다.”(132) 5장-7장까지는 이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부분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무시되고 가볍게 여겨지는 교회 내에서의 위치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6, 7장에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섭리 교리의 회복을 말한다. 5장 가벼운 하나님(“The Weightlessness of God”)에서는 자기 편향성으로 기울어진 기독교 신앙이 결국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한 인식보다 자아가 경험하는 자기 중심적인 신앙으로의 변화를 초래했으며, 저자는 자아 중심적인 종교는 결국 병들고 말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아와 자아의 잔재성에 대해 이렇듯 용감하게 말하는 현상은 실제로 자아의 “질환”을 보여주는 증거인 탓에, 결과적으로 자아에 바탕을 둔 종교는 반드시 병들고 만다.”(147) 교회가 자아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역할로의 전이와 절대성과 궁극적 가치의 부정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을 니체, 칸트, 로체등의 사상가들의 말을 빌려 설명한다. 이러한 철학적인 풍조는 슐라이마허에 이르러 하나님을 절대적인 말씀에 의한 이해보다 경험적이고 주관적인 자아의 이해로 격하시키게 된다. “이렇게 슐라이마허를 추종한 유럽과 미국의 자유주의에서는 시적인 재능이 주해를 점점 내몰기 시작했고, 감정이 이성을 대신해 하나님을 아는 주요 수단으로 자리잡았으며, 감성이 지성을 대체했으며, 직관이 객관적으로 계시된 진리를 대신하게 되었다.”(162) 자기 중심성의 강조에 의한 하나님을 소외시키는 오늘날의 경향을 바꾸기 위해 저자는 2가지 측면의 해법을 제시한다. 첫째는 스스로를 소비자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을 인식하는 도덕적인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며, 둘째는 구속을 이루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회복하는 것이다. 6장 “외부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의 초월성(The Outside God)”에서는 하나님을 가벼이 여기는 현대의 상황이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변질시켰다고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성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는 속성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가라져가는 원인으로 저자는 3가지 점을 지적한다. 첫째, 하나님 자체에 대한 무관심이 그 분의 거룩하심에 대한 인식을 희석시킨다. 둘째,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거룩함과 동반한다는 사실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들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식은 반드시 죄에 대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이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중요하게 설명하는 것이요, 이 거룩함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중요하게 설명하는 것이요, 이 거룩함에 대한 통찰력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그들의 예배를 일깨우고, 그들의 인격을 양육하고, 진리를 향한 그들의 열정을 북돋우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간청하는 기도에서 그분의 이름을 부르도록 격려한다.”(203-4) “하나님의 거룩함 없이는 은혜가 더 이상 은혜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십자가를 감추고 우리를 대신해 아들이 정죄 받도록 요구한 심판의 먹구름에서 은혜가 비롯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거룩함 없이는 은혜가 은혜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자신의 거룩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거룩함 때문에 아들의 죽음으로 죄인들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신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로서의 의미도 잃는다.”(216) 결국,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흡수되어 가는 과정에서 치명적인 함정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의 의미가 점점 해체되어 가고 간다는 사실이다. 진리도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에 부합되지 않으면, 진리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무오성에 대한 인식이 사라져 가는 것은 궁극적으로 말씀을 통해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이 포함되어 있다. 7장 내부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의 내재성(“God in the Inside”)에서는 복음주의의 모든 성공 속에서 공허감과 무의미함의 경험들 속에서 교회는 섭리교리와 십자가의 교리를 희생시키고 있다고 역설한다. 종교 시장 속에서 소비자들이 원하는 적극적 사고, 긍정적 힘과 같은 번영 신학이 원래의 전통 신학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저자는 하나님의 섭리 교리를 믿지 못하게 하는 3가지 요인으로 각종 위기 의식의 고조, 전쟁과 기아 등의 비극, 그리고 진보에 대한 신념의 포기를 제시하고 있는데, 해결 방법으로 십자가 신앙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다. “건강과 부에 대한 약속을 기독교 복음의 핵심으로 간직하려는 사람들은 중산층 미국인의 풍요를 예수님의 메시지와 혼동하여 결국 쓰라린 실망을 가져올 씨앗을 심을 뿐 아니라, 섭리에 대해 명백히 잘못된 교리를 제시하는 것이다.”(252) “하나님의 섭리가 본질상 주로 도덕적이라는 점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세상의 범죄를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마주한다는 점에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섭리가 가장 중요하게 해석되는 장소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함을 보여 주는 표시로서, 자칫 고민거리로 보일 수 있는 그런 측면들에 대해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254) 하나님께서 현재 당신의 섭리속에서 하시는 일은 불의의 타파, 자본주의의 타파, 백인 권력의 와해, 남성 권력의 붕괴, 성공적인 모금등에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과 성령 하나님에 의한 구원의 적용, 그리고 이 복음을 세상에 알리는 교회를 통해 나타난다. 8장은 복음주의 신학생들의 의식 구조(“The Coming Generation”)를 통해서 1993년과 1982년에 각각 복음주의 진영에 있는 신학생들의 사고 방식의 분석을 통해서 현재 신학생들의 복음주의관, 성경관, 교회관, 인간과 자아관, 세계관, 신학과 신관등을 총체적으로 평가한다. 복음주의의 미래는 교회를 이끌어갈 신학생들의 가치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 가지 점에서 저자는 그들의 문제점들에 대해 지적한다. 첫째는 신학생들의 내면이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면화 되지 않았으며, 성경적 세계관보다 문화적 신념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성경적인 것들과 문화적인 것들이 혼합되어 하나님의 초월성보다 내재성이 더욱 강조되어 있는 경향성이 발견된다. 그러나, 학생들이 여전히 성경을 교회 개혁의 원동력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신학이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복음주의의 미래를 비관적으로만 바라보지는 않는다. 9장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Speaking with a Different Voice”)에서는 이러한 포스트 모던의 도전앞에서 지도자들은 세상성을 버리겠다는 단호한 결단과 더 이상 소비자들이 원하는 상품을 공급하여는 경영자적인 마인드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관계는 과연 어떠한 것일까? 세계관이 결여된 복음 전도는 성공을 위한 열망 외에 다른 목적이 없는 마케팅이요, 오로지 무능한 근로자들의 늘어난 수를 결과의 평가 기준으로 삼는 마케팅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마케팅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중에 참으로 가장 실용적이다.”(327) 교회가 만약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과 현대성이 교회에 어떠한 방식으로 침투해 들어와 복음주의의 진리의 기반을 무너뜨리는지 파악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오늘날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교회들이 참으로 뉴에이지적인 내면 영성과 취사 선택된 복음의 말씀에 만족해 하고 번영 신학에 취해 있다는 복음주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교회는 마치 중국에 간 영어 교사가 영어를 가르칠 노력은 거의 하지 않고 절망적인 고독감에 사로잡혀 광둥어를 배워 결국 아무도 영어를 말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 처한 것이나 다름없다.”(329) 드라마 연속극의 캐릭터와 연예계의 문화에 열광하는 세대, 최신 i-Pod에 열광하면서, 이러한 제품들속에서 자신의 정체성를 확인하는 세대 속에서, 죄를 미워하시고 철저히 심판하시는 진노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를 어떻게 하면 불신자들에게 설명하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진리 그 자체를 성령의 능력으로 어떻게 하면, 세상성에 물든 문화적 방법들이 아닌 성경적인 원리대로 증거하고 나눌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들은 이 책을 읽은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드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에 대한 단순한 믿음, 그리고 성령께서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악하고 더러운 존재인지를 보이시도록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