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와 인간의 시작

신재****
2010-01-15
우주와 인간의 시작 / 존 맥아더 / 부흥과 개혁사 작성자: 신재원 저의 소개를 간단히 하자면 저는 창조과학하면 떠오르는 대전의 K대학에서 최근에 공부를 마쳐 학위를 받았고 앞으로 연구원을 업으로 살아가야 할 집사입니다. 평소에 창조과학에 관심이 많아 창조과학에 관한 여러 책 및 자료들을 찾아 읽어봤지만 저를 답답하게 했던 것은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한 창조과학 도서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확신에 찬 태도로 성경의 무오를 붙들기보단 과학의 기세에 밀려 일보후퇴하여 성경을 과학에 끼워 맞추기 식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이였습니다. 가장 성경적이라 생각되는 [젊은 지구론] (창세기 1장의 '욤'을 24시간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6일간의 천지창조를 주장)을 “근본주의 신학자들의 독선적 아집”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중에 맥아더 목사님의 ‘우주와 인간의 시작’은 제게 단비와도 같은 책이였습니다. 저자는 서론에서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인 방어”가 이 책의 목적이 아님을 밝히셨지만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작업이라는 것이 평소 저의 생각입니다. 그 이유도 사실 따지고 보면 저자가 지적하셨습니다. 그것은 진화론도 결국 자연주의라는 종교를 기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진화론과 창조론, 양쪽 진영에서 증거로 제시하는 과학적 결과물은 거의 동일하다는 걸 아십니까? 과학적 방법론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축소 불가능한 복잡성(혹은 규칙성)의 발견'까지'입니다. 동일한 과학적 결과물를 가지고 '해석함'에 있어서 비로소 심각한 갈등 구조가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유전자 염기서열의 해독에 대해서도 인간의 염기서열이 침팬치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한쪽에선 진화를 주장하고 반대쪽에선 해독된 염기서열을 설계도로 보고 설계자(창조주)가 있음을 주장합니다. 이렇듯 결국엔 ‘종교간의 갈등구조’ (자연주의적 종교 vs 유신론적 종교)가 되는 것이기에 서로 평행선만 달릴 뿐입니다. 물론 과학과 성경의 해석에 오류가 없다면 둘 사이의 충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은 학회나 저널 논문을 통해서 토의와 토론의 과정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인데 기존 과학계가 창조과학과의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기득권을 쉽사리 내어놓을 리가 없지요.a) 이러한 실정에서 ‘창조론의 과학적 방어’는 광야에서의 외로운 외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성경이 창조에 대해서 가르치는 바”를 철저히 가르치는 것만이 우리의 임무이며 맥아더 목사님은 그 작업을 정말 훌륭하게 해주셨습니다. 이 책의 특징은 첫째, 창세기에서 말하고 있는 진리를 “오직 성경만”으로 설명하려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론는 자연스럽게 ‘젊은 지구론’으로 귀결됩니다. 현대의 복음주의권 신학자 대부분은 지적설계론으로 창조과학을 대신하려하거나 혹은 진화론자들이 좋아하는 용어인 ‘오래된 시간’ 이란 개념을 창조론에 접목시켜 늙은 지구론을 주장합니다.b) 물론 그들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믿고 아담의 역사성을 인정하기에 저는 이러한 차이가 구원을 결정짓는 중차대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벌코프의 주장처럼 ‘그것은 주석적인 연구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과학 발전의 영향에 기인한 것’임이 분명해 보입니다.c) 만약 젊은 지구론을 받아들이기 꺼려지는 이유 중에 하나가 지구가 수십억년전에 생성되었다는 과학자들의 말을 무의식중에 믿고, 이를 성경보다 위에 두기 때문은 아닌가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둘째, 이 책은 일반 창조과학서와는 다르게 창조론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론까지 독자를 이끕니다. 저자는 창조에서 시작하여 구속, 타락, 죄, 오염, 죄책 등을 통해 결국 좀더 ‘완전한 복음’을 설명하시며 이러한 완전한 복음은 창세기의 올바른 이해에서부터 시작함을 강조하십니다. 이 책이 매력적인 것은 그리스도가 창세기의 [목적이 됨]과 동시에 계시의 중심에 계셔서 가장 밝게 빛나고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세기를 바라보는 ‘그리스도 중심성’에 가장 큰 이유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저는 과학(공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실험할 때 마다 아주 선명한 하나님의 지문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외적 수단에 의한 내 안에 어떤 것에 기인한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적 계시에 의하여 믿음으로 조명’하여 주실 때만 가능하다는 칼빈 선생님의 가르침은 진실로 옳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창세기 1장의 논쟁은 독자들을 곁길로 빠지게 합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을 하남님의 권능과 지혜 그리고 그의 창조의 경이로움에 대한 승리의 확언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무신록적 철학과 과학이 인류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 있나요? 창세기 1장이야 말로 그들이 제공할 수 없는 [희망]을 인류에게 제공합니다.d) 이러한 이유로 인해 필자는 맥아더 목사님 방식의 하나님 창조사역의 '선포'에 더더욱 지지를 보내며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든 성도에게 ‘우주와 인간의 시작’을 권합니다. a) 창조과학적 결과물에 관한 논문을 출판허락(accept)한 편집자에게 징계가 주어지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학계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증하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일것입니다. b) 심지어 저명한 국.내외 신학자(목회자들은) 중에서 유신론적 진화론을 주장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c) 과학자들이 지구의 연대 측정에 가장 많이 활용되고 있는 방사선 탄소법에 의한 지구연대 측정법은 캘리포니아 대학의 리버 교수가 제안한 지구연대 측정의 방법으로서 이로 노벨상까지 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수 많은 가설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시료과 어떠한 경우에도 오염이 되지 않아야한다, 질소에 대한 우주의 영향이 일정해야한다는 가정 등) 그 가설 중 어느 하나라도 잘못되었을 경우 이는 치명적이 오류에 빠지게 되고 최근에 그에 대한 결과들이 속속히 나오고 있습니다. 과학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데 이런 과학에 기가 죽어 성경의 해석을 바꿔가는 모습이 답답합니다. 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과학의 힘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의 결과물로 지금처럼 우리가 엄청난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는 ‘우주와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는 과학이 철저하게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d) 고든 웬함, 『WBC 성경 주석, 창세기(상)』, 박영호 옮김, 솔로몬 140-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