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 생애와 사상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은 책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이다. 요즘 이 책을 다시 읽고 있는 중인데 그 단초(端初)는 매월 마지막 주에 있는 중‧고등부 특강 시간에 「신앙감정론」을 강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읽으면서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아 생각을 바꿨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읽은 상태라서 그냥 다시 한 번 읽자하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는데 본문을 요약하는 수고까지 하게 되었다. 그동안 수차례 읽은 책이었지만 역시 또 다른 깊이로 다가온다. 에드워즈의 사상은 높고 넓고 깊다. 이 책과 더불어 양낙흥 교수의 「조나단 에드워즈 생애와 사상」도 재독(再讀)하게 되었다. 「신앙감정론」 부분을 참고해 가며 읽었는데 너무 좋아서 처음부터 읽게 되었고 방금 전 끝마쳤다. 한때 에드워즈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관심과 사랑이 식어져 오랜 시간 그를 찾지 않다가 다시 만나고 있는 요즘 나는 너무 행복하다. 이유는 하나다. 참된 신앙의 본질은 영적이며 초자연적인 빛 즉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아름다우심 한마디로 그분의 거룩하심을 볼 수 있게 되며 영적 지식으로 인한 영적 이해가 있어야 사변적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맛보고 알 수 있는 마음의 감각으로 끌리고 강하게 소망하게 된다는 것에 대한 그의 체험적 진술 때문이었다. 영적 지식, 영적 이해가 없이는 거룩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 그것을 보는 것이야말로 성화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다. 하나님의 신적인 일들의 탁월하심을 보는 것이 힘 있는 영적 생활의 열쇠이다. 에드워즈의 글은 그것을 경험해 봐야 안다. 머리로 공부해서 개념적으로 아는 것은 전혀 쓸모없다. 맛보고 경험하고 체험해야 한다. 신적인 일들의 탁월함과 영광스러움이란 무엇인가? 도덕적 완전함의 아름다움, 신적인 일들의 달콤함이란 무엇인가? 영적 감각으로 그것을 보고 맛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비록 중생의 표준을 지나치게 높인 측면이 있었을지는 모르나 그의 신앙에는 힘이 있었고 헌신할 수 있었다. 그것을 보고 배워야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 생애와 사상」을 처음 읽은 건 약 6년 전의 일이다. 그때는 막연히 좋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크게 다섯 가지 관점에서 이 책의 탁월성을 논하고 싶다. 첫째는 에드워즈 신학의 청교도적 배경을 충실하게 설명한 점이다. 저자는 토머스 셰퍼드의 회심론에 대한 평가는 “에드워즈의 회심론과 그 핵심에 있어 일치되므로 셰퍼드의 회심론의 평가는 에드워즈 신학의 가장 중요한 일면에 대한 평가로 연결된다.”고 말한다. 셰퍼드는 미국의 청교도주의를 논함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에드워즈는 「신앙감정론」에서 다른 저자들을 132번 인용하는데 그 중 75번이 셰퍼드의 「열처녀 비유」에서 인용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에드워즈 신학 이해에 토머스 셰퍼드의 신학에 대한 기본 지식은 필수적이다. 양낙흥 교수는 에드워즈의 회심론을 한마디로 추구론(doctrin of seeking) 내지 준비론(preparationism)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셰퍼드의 회심론을 상당 부분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제3장에서 무려 55페이지에 걸쳐 토머스 셰퍼드의 회심론을 자세히 다룬다. 「건전한 신자」에서 셰퍼드는 구원의 은혜를 받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네 가지의 준비 단계를 소개한다. 죄에 대한 깨달음, 통회, 겸비, 그리고 믿음이다. 셰퍼드는 참된 회심에 있어 성령의 첫 번째 작업이 “죄를 깨우치는 것”이라고 한다. 셰퍼드뿐 아니라 많은 청교도 신학자들의 회심론의 주된 강조점은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 없이는 믿음도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죄를 못 느끼는 사람은 용서의 필요성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없다. 여기서 깨닫는다는 것은 관념적 깨달음이 아니라 영적 깨달음이다. 죄를 살아있는 것으로 보고 죽음을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참된 회심에 있어 성령의 두 번째 작업은 죄에 대한 영적 깨달음의 정도인 “통회”이다. “영혼이 죄와 비참으로 인해 상하되 죄와 단절될 정도의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는 것이 통회다.” 세 번째 작업은 “겸비”다. 통회의 목적은 “겸비해져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가서 그리스도가 그의 죄를 처리하시게 하는 것”이다. 겸비는 교만과 반대된다. 성령의 네 번째 작업은 믿음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인데 그것은 지적 동의를 배제하지 않는 마음으로 믿는 것이다. 즉 셰퍼드의 신앙관은 전인적인 것이다. 저자는 셰퍼드의 회심론을 평가하면서 청교도 구원론의 핵심을 “체험”이라고 말한다.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음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에드워즈가 그러했다. 그의 주된 관심은 ‘참된 신앙이란 무엇인가’였다. 그리고 그것을 체험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살피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구원관이 그러했던 것은 토머스 셰퍼드의 회심론을 상당부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낙흥 교수는 학자적 양심으로 스쳐지나가듯 대충 얼버무리지 않고 자세하고도 치밀하게 셰퍼드의 회심론을 분석 평가한다. 본서의 두 번째 탁월성은 구원에 관한 에드워즈의 견해를 명확하게 소개할 뿐 아니라 비록 짤막하지만 「신앙감정론」을 평가하면서 칼빈과 에드워즈를 비교 분석하는데 있다. 에드워즈는 신자의 고백과 일치되는 삶의 모습을 교회원의 자격으로 인정하지만 칼빈은 “육을 죽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훈련”해 가는 과정을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보았다. 신자라 할지라도 대부분의 경우 영적으로 아주 연약하며 영적 진보가 더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보다 현실주의적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어떤 사람 안에 육적인 요소가 강하게 잔존하는 것, 즉 옛 사람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을 아직 회심하지 않은 탓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에드워즈는 그의 경건을 증명할 만한 “커다란 적극적 증거”가 있어야 참 신자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에드워즈는 이상주의적 혹은 급진적이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의 표준을 너무 높이는 경향이 있다. 참된 종교의 원천으로 그리스도의 탁월성 즉 거룩의 아름다움과 신적인 일들의 영광을 보며 그것을 기뻐하고 즐기는 가운데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야말로 참된 은혜를 받은 자들이라면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은 참된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이 된다. 하지만 평생 그것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 봐야 한다. 어떤 신자가 자신의 유익 때문에 신앙의 길에 들어섰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아름다우심에 매료되어 순례의 길을 걷는 순서의 바뀜이 있어야 한다. 마음의 감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자들도 그것을 경험해야 한다. 에드워즈의 신앙은 진리의 반석위에 그것을 체험했고 그의 신앙에는 힘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강력한 임재를 체험함으로써 신적인 일들의 탁월성을 맛볼 수 있는 마음의 감각이 있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야말로 모든 것, 즉 전부였다. 하지만 그의 표준은 너무 이상주의적인 것 같다. 일반화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세 번째는 두 번째와 연결되는데 저자의 견해가 일방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에드워즈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의 중생의 표준이 지나치게 높은 면이 있을지라도 에드워즈의 높은 영적 차원에 도전을 받고 그가 제시하는 높이를 우리의 목표로 삼고 추구해야 한다. 한마디로 성화의 목표로 삼고 추구한다면 우리의 영성과 경건에 큰 유익이 될 것이다. 에드워즈의 신학을 구원론으로서보다 성화론의 교과서로 사용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한국적 상황의 적용부분이다. 본서는 에드워즈의 신학을 단순히 배우는 것 그 이상이다. 에드워즈의 사상을 한국적 상황에 적용하는 면이야말로 번역된 외국문헌에 비해 이 책의 가치를 더해준다. 먼저 현대에 유행하는 사영리에 기초한 전도 방식은 청교도식의 깊이 있는 가르침에 의해 수정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모든 죄 값을 지불해주셨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시고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식의 전도 방식은 피상적이다. 한 번 입으로 고백했다고 해서 거듭났다고 가르치는 것은 위선자들만 양상해낼 뿐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도덕적 위기 상황은 이러한 인스턴트(instant)식 전도 방식 때문이다. 죄에 대한 민감성, 죄의 심각성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깊은 감각 역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 하지만 어떤 자가 그것에 안주해 죄를 지어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진노하심에 대해 개의치 않는다면 그가 누리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심각하게 재고한다. 그렇기 때문에 강단의 책임이 중요하다. 복음의 초점이 인간의 현세적 필요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사회적 지위, 물질적 풍요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고 강조하는 오늘날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죄에 대한 민감성과 죄의 부패함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진노하심에 관한 것이다. 복음의 핵심은 거룩이다. 이에 대해 에드워즈는 삶과 신학으로 분명하고 깊게 보여주었다. 칼빈주의를 사랑하고 지향한다는 한국장로교회는 에드워즈로부터 그것을 새롭고 철저하게 배워야 한다. 새롭게 배워야 한다는 것은 사변적 지식에 만족하는 신학적 풍토(風土) 때문이다. 고대 교부들은 기도를 신학이라고 보았다. 학문은 대상을 연구하지만, 신학은 인격 곧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고 대화하는 교제이다. 기도에서 우리는 교제하시는 하나님을 뵙는다. 기도 중에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알게 된다. 기도가 곧 신학이다. 에드워즈는 이론적 지식만으로 참된 믿음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믿었다. 단순한 지적 동의만으로는 부족하다. 행함 없이 입만 살아있는 자들은 귀담아 들어야 한다. 부모님이 믿기 때문에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에 고백하는 것은 쓸모없다. 에드워즈는 회심의 은혜를 받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고 추구하는 가운데 그것을 경험했다. 메마른 교조주의(敎條主義)에 빠져있는 우리들에게 그의 신학은 경종(警鐘)의 소리가 되어줄 것이다. 다섯 번째 탁월성은 에드워즈의 주저(主著) 「부흥론」과 「신앙 감정론」에 관한 명확한 요약이다. 제5부 「종교적정서」를 읽다가 재독하게 되었는데 다소 난해하고 어려운 부분을 이해함에 있어 양낙흥 교수의 요약은 큰 도움이 되었다. 한 가지 크게 아쉬운 점은 「자유의지론」과 「원죄론」을 깊이 있게 다루지 않은 것이다. 「부흥론」과 「신앙 감정론」 그리고 「겸허한 질의」처럼 자세하게 써주었다면 훨씬 더 풍성하고 균형 잡힌 연구서가 되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에드워즈의 철학적인 글들에 대해서는 개요만 소개하고 자세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한다. 첫째, 일차적으로 에드워즈의 구원론과 회심론, 성화론, 교회론, 부흥론, 종교적 체험 등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고 그의 형이상학적인 작품들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철학적인 작품들의 진술 방식이 고도로 사변적이고 관념적이어서 에드워즈에 대해 기본적인 것조차 접해 본 적이 없는 한국 독자들에게 별 흥미를 끌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셋째, 철학적인 작품들을 소개하는 것은 또 하나의 방대한 저술을 요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개요만 소개한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방대한 저술을 요하는 작업이라고 했는데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저자 본인이 그 일을 해주었으면 한다. 필력(筆力)이 좋기 때문에 독자로서 명쾌한 도움을 받고 싶다. 4-5일 동안 이 책과 함께 보낸 시간은 행복 그 자체였다. 지난 금요일에는 철야를 끝내고 찜질방에서 새벽 2시가 넘도록 읽었다. 그만큼 강하게 사로잡는 무엇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전보다 에드워즈를 더 깊이 만나는 시간이었고 신적이며 영적인 빛에 대한 사모함과 더불어 그것의 체험을 위해 부르짖었다. 에드워즈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를 우리의 수준으로 끌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수준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 지적이해와 함께 체험이라는 것도 깊이 알게 되었다.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하는 것은 참된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것과 같다. 이 책이 그것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꼭 읽었으면 한다. 10점 만점에 10점이 아깝지 않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