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하나님의 영광

신재****
2010-02-17
이 책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다룬 책입니다. 신학적 논의에 해당하는 1부가 전체분량의 2/3을 차지합니다. 1부의 전반부에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기본적인 논의를, 1부의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저자의 결론을, 그리고 마지막 2부에서는 1부에 기반하여 실천적 적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1부의 후반부에 중점을 두고 책을 집필한 듯하나 저는 그 결론에 대해서 부족함 및 아쉬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저자는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알미니안주의적 입장을 반대하고 있지만 그것이 온전한 개혁주의적 입장 인지에 대해서 저는 다소 회의적입니다. (이에 대한 논의는 이 글의 본론에서 다루겠습니다.) 그래서 이 책 제목을 “완전한 하나님의 영광” 이 아니라 “(좀) 더 큰 하나님의 영광”으로 지은 건 잘 한 일이다라는 우스꽝스러운 생각도 해봤습니다. 저는 오히려 1부의 전반부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기본 사항을 좀 더 심도 있게 정리할 수 있었고, 2부에서 평소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실천적 적용부분을 구체적으로 정리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1부의 전반부(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기본적인 논의)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정리하자면 첫째 하나님의 [초월적]인 자기현존과 <내재적>인 자기참여 이 두 가지 개념은 함께 조화를 이루며 공존한다는 것과 둘째, 인간은 성향의 자유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성향에 따라 자유롭게 행할 바를 선택하는 능력)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를 비롯하여 찰스 하지까지) 서양 전통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초월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그 초월성을 ‘무시간적’이란 개념으로까지 오해해왔습니다. 그러나 현대로 접어들면서 자유주의 신학과 동양의 신비주의와 결합한 유사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내재적 속성만을 강조해 많은 폐단을 낳고 있습니다. 이 양쪽 극단에 동시에 저항하여 하나님의 [초월성]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내재적 참여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초월성]이 그 분의 ‘내재적 참여를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이 둘의 조화와 공존을 강조한 저자의 논리전개는 정말 탁월했습니다. 또한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그것이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행동임을 확실히 함으로서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도 변명치 못하도록 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설명하는데 아주 필수적인 접근이라 생각됩니다. 이렇듯 1부 전반부의 결론만으로도 충분히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설명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한발 더 나갑니다. 제 생각엔 그것이 오히려 사족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 저자는1부의 후반부에서 중간지식(현실세계에서 주어질 상황과 또한 다른 상황이 주어졌을 때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성향의 자유를 가지고 자유롭게 선택하되 중간지식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를 이루도록 그 환경(상황)을 만들어가신다고 주장합니다. 이렇듯 저자는 중간지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공존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에 요셉과 그의 형들 이야기를 예로 들어가며 자신의 주장을 확고히 하려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선 신적 특성상 당연히 중간지식을 가지십니다. 그러나 그 결론(중간지식에 ‘따라’ 하나님께서 환경조성을 조성하신다)에 대해서는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악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되며 이는 하나님의 지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제가 이해한 개혁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지식은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적 전지성이라는 본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아는 지식(필연적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는 알미니안주의자들도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주장처럼 중간지식도 가지고 계십니다. 본성상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개혁신학에서는 하나님께선 이 세상을 하나님의 의지대로 결정하시고 실현시키시는 지식(의지적 지식) 또한 가지고 계심을 고백합니다. 가롯 유다와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의 몸값을 흥정할 시 가롯 유다의 의지가 은30에 예수님을 팔 것을 알았기에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을 통해 은 30을 달아주도록 유다의 환경을 그렇게 조성한 것일까요? 저자의 주장 데로라면 유다가 만약 은 50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중간지식을 사용하여 제사장을 통해 은 50을 제안했겠네요. 저자가 아무리 좋게 말하려 노력해도 하나님께서 중간지식을 이용하신다면 은30이라는 환경은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결정된 것입니다. 옳지 않습니다. 신약저자들이 예수님과 그분에게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를 모두 구약모형의 성취적 관점에서 해석해 나갔음을 생각할 때 스가랴 11:12에서 거절당한 양떼를 먹이는 메시아적 인물인 ‘목자’에게 주어진 품삯이 은 30이였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 모형을 의도적으로 성취하기 위해 유다가 은 30에 예수님을 팔도록 의도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 외 얼마나 많은 성경 구절이 사람의 악한 행동 조차 하나님의 의지'안'에서 일어남을 ‘직접적’으로 증명합니까? 그러므로 이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유다의 마음을 은 30에 예수님을 넘기도록 의지적으로 정하셨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지금 신론에서 다루고 있지만 결국 구원론과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기에 더욱 조심해서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선행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악의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환경이나 조건만을 조성하실 뿐만이 아니라 (악한 행동조차) 인간으로 하여금 그러한 행동을 행하도록 그 분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심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더욱 하나님 되시게 함을 믿습니다. 그럼 인간은 악한 행동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닌가라는 반문을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물론 하나님께서 작성하신 것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분명 ‘필연적’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강제’적이지는 않습니다. 이는 저가가 1부 전반부에서 강조한 데로 인간의 행동은 ‘자유’롭습니다. 죄에 대한 책임은 인간의 행동이 ‘필연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책임은 인간의 행동이 ‘자유’로운 것이냐 ‘강제’적인 것이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동은 하나님의 의지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필연적’인 것이지만 분명 자유롭게 (저자의 말을 빌어 성향의 자유를 가지고) 행하기에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하면서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도 분명히 하는 성경적인 개혁신학적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중간지식이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살짝 양보함으로써 그 해결책을 찾으려 합니다. 이러한 접근방식에 대해서 저는 반대합니다. 이렇듯 저자는 서론과 1부의 전반부에서 충분히 성경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설명하다가 1부의 후반부에서는 중간지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하나님을 변호하려다 스스로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열린 신론이 판치는 세상에서 그들과 대화하려는 저자의 고민 끝에 내려진 결론일거라 믿기에 또한 2부에서의 탁월한 적용 덕분에 1부에서의 약간의 불만은 거의 만회될 수 있었습니다. 2부에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관련한 적용으로 고난과 기도 그리고 하나님을 섬김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특별히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부유함과 우리의 가난함을 알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그의 자비와 은혜를 제공하시기 위함이라는 기도에 대한 설명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명하시는 이유를 아주 명확히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이해할 경우 이는 “여호와는 내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라는 고백과 함께 진정한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됩니다. 또한 동시에 어떠한 악도 스스로 행한 우리의 책임이 됨을 명확히 하기에 거룩한 <두려옴과 떨림>을 가지게 됩니다. 이 둘 사이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이해하여 진정한 [위로와 평안] 그리고 거룩한 <두려움과 떨림>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길 원하는 모든 이에게 이 책을 권하며 마지막으로 이 둘을 효과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칼빈 선생님이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인용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다시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자의로 허락하시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전능자로서 (우리의 실수와 잘못조차) 악에서 선으로 이루실 수 없다면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이 행해지도록 하락하지 않을 것이다.” (Augustine, Psalms, Ps. 111:2.)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악인의 마음속에서도 자신이 원하시는 모든 일을 이루시고,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그들의 악행에 대하여 책임을 물으시니, 이런 판단에 대해서 누가 감히 떨지 않겠는가” (Augustine, Letters, xciii. 2.) 별점은 4개 반 정도로 생각하지만 4개와 5개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4개로 함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