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변화시키는 성경의 힘

김병****
2010-04-16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군중 속에 고독’이라는 말이 종종 사무칠 때가 많다. 혹자는 개인주의의 범람 안에서 느끼는 인간의 고독이라 해석하지만 신자로서 받아들여 지는 건 다르다. 진리를 맡지 않은 자의 범람 안에서 진리를 맡은 자로서의 고독으로 사무친다. 이런 상황은 비단 세상 안에서 뿐만 아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라 할지라도 지식의 경중을 떠나, 성경의 가장 높고 유일한 권위를 믿고 존중하느냐 마냐 하는 문제는 본질적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참된 신자들을 외롭게 한다. 필자처럼 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만나는 사람들이 가장 크게 의존하는 두 가지가 있다. 바로 교육이론과 심리학이다. 특히나 심리학은 상담의 근간을 이룬다 생각하기에 아이들을 만나는 교사로서 갖는 의존성은 가히 절대적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려’, ‘존중’,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음’, ‘성품’, ‘응원’, ‘기분 좋음’ 등의 말이나 충고들이 현대 심리학을 통해 산출된 위대한 2세들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모르고 진리를 맡지 않은 자들이 이러한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신자들이다. 신자들조차 세상을 따라가야 하는가? 혹자는 ‘일반은총’를 예로 들며 현대 심리학을 옹호하기도 한다. 좋다! ‘일반은총’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치자. 그럼 비성경적인, 성경의 진리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개념들은 무엇인가? 이것이 ‘일반은총’인가? 화란의 신학자 스킬더의 용어를 잠시 빌리는 것이 가장 좋을 듯 하다. 일반은총이라 불리는 영역 안에서 성경과 다른 비성경적인 내용은 ‘일반은총’이 아닌 ‘일반저주’이다. 죄인인 인간이 만들어내는 개념들의 한계를 정하지 않고 받아 들인다면 인간에게 성경이 필요한 이유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본서는 신자들의 이러한 타협과 분별없음에 대해 커다란 일침을 가해 준다. 저자인 제이 아담스는, 정말 미련-표현하자면-하다 싶을 정도로 성경을 붙들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저자의 자세가 가장 현명한 자세이다! 본서는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을 중심으로 쓰였다. 상담자로서 피상담자를 왜,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며 피상담자가 상담을 통해 궁극적으로 취해야 할 모습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25개의 소주제를 통해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본서에서 얻은 유익은 정말 많지만 크게 두 가지만 이야기해 보자. 먼저 밝혀둘 것은 필자는 본서의 ‘상담자’를 ‘교사’로, ‘피상담자’를 ‘학생’으로 바꿔 생각하며 읽었다. 첫째, 성경을 공부하여 자세히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5장인 ‘변화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역할’에서 저자의 생각을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균형의 문제라기보다 성경적 가르침과 신학을 이해하느냐의 문제다.” –p.89- 필자 같이 기독교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들이나 기독부모들이 가장 크게 받아들여야 할 제시이다. 말씀을 기초로 하여 교육을 한다곤 하지만 성경을 읽는 것으로, 매일 아침 성경 몇 구절 보는 것으로는 성경의 깊은 우물을 볼 수도, 퍼낼 수도 없다. 성경은 공부하고 연구해야 하는 책이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성경에 대한 이해는 신비스러운 수단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한 연구를 통해 얻는 것이다.” –p.96(각주)- 국내의 유명한 말씀 암송단체를 이끌고 있는 혹자는 아이들에게 ‘말씀을 말씀대로’ 가르치라고 주장한다. 그분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말씀을 말씀대로 알려준다는 명목’ 하에 자녀들과 학생들을 방목하고 있는 것은 아닌 지 생각해 본다. 성경은 명제적인 면을 포함하고 있으며 실제적이다. 의도하는 바를 언어와 통해 나타내기에 분명한 ‘의도’와 ‘방향’이 있다! 그렇다면 교사된 우리는 얼마만큼 성경의 의도를 상고해야 할까? 열왕기서에서 황금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궤의 운송방법을 잊어버리고 언약궤를 수레에 실었었다. 이 때문에 ‘웃사’라는 사람이 죽음을 맞이한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고 정하신 방법이 성경에 명시되어 있다. 그 뜻을 찾고 찾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걸만큼 신중을 기해야 한다. 둘째, 피상담자(학생이나 자녀)에게 진실을 말해 주어야 한다. 여기서 ‘진실’이라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현재 상황이다. 상담을 받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죄’의 문제들이라는 저자의 말대로 현재 피상담자의 문제를 상담자가 낮은 자존감이나 감정의 문제로 치부하는 건 또 하나의 죄이다. 성경이 말하는 자신의 상황을 알려주는 것은 상담자(교사나 부모)가 피상담자를 존중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이지만 진실을 은폐하는 상담자는 피상담자를 속이는 것과 다름 아니다. 이와 맞물려 저자는 ‘교훈과 책망’에 관하여도 이야기한다. 이는 현시대에 잊혀진 ‘진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모들은 자녀에게 ‘안된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 시대이며, 교사는 학생에게 ‘너가 틀렸다’라는 발언을 지양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교훈과 책망, 특별히 책망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책망이 피상담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기 때문이다. ….중략……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p.192-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것! 오..이것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책망이든 무엇이든 상관이 없는 게 성도의 모습 아닐까? 행여 ‘교훈과 책망’으로 인해 상담자와의 거리가 멀어진다 한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면 의미 있는 일 아니겠는가. 진리가 없는 듯, 어디에도 심판과 끝은 없는 듯 세상을 향유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세상 사람들 속에서, 신자라 불리는 그리스도인들은 갈 길을 잃어 버릴 수 있다. 그만큼 유혹적이며 매혹적이고 자극적이며 대담한, 지극히 교묘한 시대이다. 특별히 특정한 대상을 바라보며 그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으로 가르치길 원하는 이 땅의 수많은 교사들은 지금보다 더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들이 성경의 충분성과 절대성을 알고 믿으며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온 힘을 쏟는 그런 날들이 오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