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란 무엇인가

강석****
2011-05-31
기독교 신앙의 기둥 같은 교리는 바로 칭의론이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신칭의 교리를 '교회가 서기도 하고 무너지기도'하는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라고 하였다. 굳이 거창하게 '교회가 서기도 하고 무너지기도'하는 교리까지 나갈 필요도 없다. 폭을 좁혀 말하면, '신자가 서기도 하고 무너지기도'하는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구원얻는' 기독교의 칭의론에도 여전히 반펠라기우스주의는 남아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구원 받는다' 생각하지 않고,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쪽에 가깝게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될 때에 믿음은 구속이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수단이 아니라 구원을 주는 공로로 변질되게 된다. 그리 될 때에 신자는 자신의 영적 상태와 행위에 일희일비하는 양상을 보인다. 은혜가 충만할 때는 구원받은 느낌이 나다가도, 은혜가 떨어지면 자신이 구원받았는지를 의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칭의 교리는 교회는 물론 신자를 서게도 하고 넘어뜨리기도 하는 엄중한 교리가 된다. 평상시에는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칭의 교리의 위력과 가치를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정작 신자가 고난과 시험에 부딪쳐 보면 그 때라야 진정한 칭의론의 위력과 가치를 절실히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교회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 칭의 교리를 처음부터 제대로 신자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 증거는 앞서 말한대로 많은 신자들이 믿음의 행위가 자신들을 구원한다고 믿는다는 데서 드러난다. 그 원인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마이클 호튼 교수의 지적대로, 많은 신자들이 자신들이 오랜시간 교회를 출석하면서 설교를 들어왔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는 오류에서 나온다. 더군다나 지금은 미디어의 발달로 기독교 방송과 라디오, 인터넷 생방송 등도 많기 때문에 설교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목사님의 지적처럼 그런 가운데에서도 '풍요 속의 빈곤'은 나타나는데, 수필가의 신변잡기 같은 이야기나 권선징악이나 유교적 가르침에 기반을 둔 유사 복음은 넘쳐나는데 정작 성경에 입각한 성경신학적이고 개혁신학적인 설교는 듣기 힘들다는 데 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칭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천로역정이 있는데, 그 길은 다름 아닌 죄(Sin)와 십자가에 대한 정직한 조우다. 설교자는 성경이 외치는 대로 성도 여러분들은 본시 죄의 본성을 타고난 죄 그 자체(Sin itself)요.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었는데 독생하신 하나님의 대속하심으로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데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기 싫은 것보다는 좋아하는 것만 먼저 하려 하듯이, 듣기 싫은 귀에 거슬리는 말보다는 하지 좋아하는 일과 듣기 좋아하는 말을 먼저 듣기 원한다. 죄에 대한 자각이 얕다보니 믿음을 통해 구원얻은 용서에 대한 감격도 얕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현대 신자들은 '냉과리'가 된다. 냉과리는 "잘 구워지지 않아서 불을 붙이면 연기와 냄새가 나는 숯"을 말한다. 사전이 설명하는대로, 실제로 냉과리 같은 신자는 교회 안팎에서 연기와 냄새를 많이 일으킨다. 신자고 교회고 기본에 충실한 게 좋다. 그리고 옳다. "아드 폰테스", "원전에 충실하라"는 르네상스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의 외침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