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설교자 로이드 존스
본서는 로이드 존스의 사역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려는 목적으로 저술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에게 로이드 존스의 일대기를 제공하지 않는다. 또한 로이드 존스의 탁월한 설교목록을 소개해주거나, 혹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던져줄 수 있는 아름다운 일화를 들려주는데도 별 관심이 없다. 본서는 평전이라기에는 개인사적 정보가 부족하고, 에세이라기에는 다소 무게가 있다. 저자는 로이드 존스를 모든 목회자의 표본으로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본서를 통해 최소한 4가지 면에서는 분명하고도 매우 중요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1. 복음전도자로 살아가는 삶의 영광 로이드 존스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된 것은 자기 희생을 각오한 정신이 아니라, 자신에게 특별한 은혜와 막중한 책임이 주어졌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누구든 복음의 사자로 부르시는 것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영예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의사 협회의 집행위원회는 1968년 웨스트 민스터 채플에서 로이드 존스가 은퇴할 때, 다음과 같은 감사의 편지를 썼다. “우리는 목사나님이 인격적으로 본을 보여주신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사님이 보여주신 본보기는 목회 사역의 중요성과 존엄성을 참으로 독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존 파이퍼는 설교자들이 교회에서 봉급받은 소명자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설교자의 사역 목적은 영원하며 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전문적인 직업도 그 목적을 함께 나눌 수 없다. 세상의 전문 직업인들은 사람들에 의해서 혹은 그들 스스로가 정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셨다는 치욕적이며 어리석으며 소름끼치지만, 너무나 영광스러운 이 사실이 설교자의 삶의 중심이다. 2. 성경에 충실한 설교자 저자는 다른 무엇보다도 로이드 존스의 “성경에 대한 충실한 자세”를 높이 평가한다. 사실 로이드 존스는 신학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비록 그의 신중한 삶의 자세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로이드 존스가 인간관계나 사역방침에 있어서 말이나 행동에 전혀 실수가 전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이드 존스가 ‘성경에 충실한 설교자’였다는 점에서는 거의 이견이 없다. 로이드 존스에 대해서 가장 격하게 반대한 신학자 중에 하나였던 브렌처마저 그의 신학이 ‘성경적 관념’이었다는 것을 인정할 정도다. 사람들은 항상 ‘나름대로’ 성경에 충실하다. 어느 교회이든지 교회 입구에 ‘우리 교회는 성경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써놓지 않는다. 한국 교회에 개혁주의를 표방하지 않는 교회가 몇이나 되겠는가? 모두를 개혁주의를 좋아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테네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 드리는 제단을 발견한 것처럼, 우리는 오늘도 “알지 못하는 개혁주의”를 찬양하는 제단을 경험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사역을 하며 만나는 목회자들은 모두 스스로 ‘성경’에 충실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좋아하는 것을 ‘성경에 충실하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성경’을 언급하며, ‘성경에 충실’하려 한다. 또 다른 사람은 성경에 대한 학위를 갖고 다년간 명망있는 학자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을 ‘성경에 충실하다’는 의미도 사용하다. 사람들은 그외 여러가지 이유로 스스로를 ‘성경에 충실한’ 사람으로 만든다. 결국 ‘성경의 충실하다’는 슬로건은 그 내용의 다양성으로 인해 ‘유일한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서는 참으로 성경에 충실했던 신앙의 선배를 통해 ‘성경의 충실하다’는 말의 의미를 숙고하게 한다. ① 성경에 충실하다는 것은 성경이 주장하는 “성경의 가치”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라 다른 경력을 더 소중히 여기는 시대에 사역을 했다. 비복음주자들은 ‘교리주의’를 지성적 자격과 학문을 결여한데서 나온 것으로 간주하고 평가절하시켰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성경을 믿는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설교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시대가 인정해주는 ‘성경의 가치’가 아니라, 성경에서 드러난 ‘성경의 가치’를 존중했다. 바울의 방법은 그들에게 교리를 펼쳐놓는 것, 그들을 가르치는 것, 그들을 교훈하는것, 그들을 세우는 것, 그들의 기초를 다지는 것입니다. ... 영적 바보는 교리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② 성경에 충실하다는 것은 성경이 중요하게 전하는 메세지를 각별하게 드러내고 선포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자유주의 신학이 맹위를 떨치며, 사람들이 제각기 성경을 자기 방식과 형편에 맞추어 생각할 때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기록입니다. 하나님은 행위자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개입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시작하시는 분이요, 모든 곳의 모든 것을 계획하시는 분입니다. ③ 성경에 충실하다는 것은 말과 실제 삶에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복음 메시지에 대한 본질적인 증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성령의 능력에 있다고 보았다. ④ 성경에 충실하다는 것은 겸손히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다. 로이드 존스는 정확한 교리로 그 자체만으로는 전혀 충분한 대책이 되지 못한다고 확신했다. 오직 성령만이 변화시킬 수 있다. ⑤ 단순히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성경에 충실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결코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라는 평판이나 자신을 내세우는 호칭이 능력있는 선포를 보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는 자유주의만큼이나 복음주의자들의 설교도 생명력을 잃었다며 탄식했다. 로이드 존스는 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복음주의자들은 사람들을 잃어버렸다는데서 그 이유를 찾았다. 3.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하는 것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 저자는 로이드 존스의 선하고 아름다운 사역 뿐만 아니라, 위대한 믿음의 선배의 다소 부족한 부분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독자들은 본서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다. ① 신약 성경은 어떤 한 형태의 확신을 ‘성령 세례’로 지칭하기 보다는 오히려 모든 참된 확신을 성령의 역사로 가르치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전통적인 개혁주의의 가르침을 따라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님을 분명히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내주하는 그리스도인과 내주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 나뉠 수 없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그 당시 많은 교회들이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신다는 이유로 만족해버리는 타성에 젖은 신앙의 습관을 두고 볼 수 없었다. 특히 1964년 7월에 IVP가 런던, 랭햄 플레이스의 올 소울즈 교회 교구 목사인 존 스토트의 40페이지 분량의 소책자 ‘세례와 충만 :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이 출판되는 것을 보고,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강조를 더욱 굳게 하기로 결심했다. 로이드 존스는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역사를 어느 정도 경험하지만, “성령세례”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못박았다. 로이드 존스에 의하면 마치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 세례’에 대한 기록들 처럼,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시기에,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성령 세례’를 주신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모든 성도들이 ‘그 특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인내하고 기다리고 사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논지는 결국 ‘성령세례’와 모든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보통의 믿음’의 불연속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버린다. 물론 개혁주의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해야 할 필요를 인정한다. 그러나,개혁주의는 로이드 존스가 말하는 ‘궁극적인 의미’의 확신을 모든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믿음’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②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경험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일이지만, 이것은 성도들의 순종하는 삶과 깊은 관련이 있다. 로이드 존스는 이 점에 있어서도 개혁주의의 전통에서 빗나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성령 세례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여러분 가운데 많은 이가 오해하는 거서럼 그 일이 일어난다고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여러분은 선한 삶을 살고,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하겠다고 말한대로 모든 일을 행할 수 있으나 그런다고 해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약속에 의존하는 기도와 달리, 성령세례 교리에 기초를 둔 기도는 실망을 가져올 수 있다. 로이드 존스도 ‘성령세례 교리’ 어떤 위험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런 가르침은 오늘보다 내일만은 바라보게 만든다. 더우기 성령세례에 관한 논의는 사소한 개념의 차이를 가지고, 지나치게 왈가왈부하는 말장난이 아니다. 로이드 존스의 ‘성령세례’ 교리를 그대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신자들은 가장 좋은 것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의심을 물리칠 수 없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실지도 모르는” 기도를 우리에게 최고의 목표로 정해주신 것일까? 이것이 성령의 가르침인가? 저자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물론, 우리는 성경과 교회사의 기록된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때로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삶의 환경과 부족한 자신의 모습이 드러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끊임없이 그의 백성들을 향해 부어졌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 아닐까? ③ 성령세례는 감정의 차원에서만 이해되어 질 수 없다. 벤저민 모건 파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느낄 수 있는 위로가 없어서 지킬 수 없는 것이 신앙 외에는 아무것도 없을 때에도, 이 신앙만으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윌리엄 네빈스가 “종교는 열광이 아니라, 습관이어야 한다.”고 말할 때 가리키는 의미다. 단순히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일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리는 것처럼 경솔한 행동은 없다. 4. 교회는 동호회가 아니다. 로이드 존스는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이 도외시된 교파의 연합에 일관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1966년에 복음주의 연맹의 사무총장인 모건 더햄은 로이드 존스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무엇이 그렇게 ‘엄청난 잘못’인가? 많은 사람들은 로이드 존스가 WCC에 공개적으로 반대함으로 복음주의와 자유주의자뿐 아니라, 복음주의자들 안에서도 분쟁을 촉발했다고 비난했다. 우리는 로이드 존스의 모든 결정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다. 만일 1966년에 복음주의자들들 간에 오해가 있었다면, 그 책임을 로이드 존스와 의견을 달리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가 복음과 교리를 떠난 교회의 일치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일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적 연합은 오직 복음의 핵심 진리들에 대한 공통적 신앙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신약 성경은 교리적 진리를 교제보다 앞서는 것으로 제시한다. 로이드 존스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로이드 존스가 분열의 원인이었지만, 로이즈 존스가 볼 때는 사실 자신을 ‘분리주의자’로 매도하는 사람들이 교회 분열의 장본인들이었다. 우리는 “교회의 연합”을 위해 어떤 위대한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다. 교회는 이미 그리고 영원히 하나다. 누가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을 파괴할 것인가? 문제는 교회의 하나됨을 끊어내는 파괴적 행동이 아니라, 거짓된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기만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것을 간파했으며, 또한 확신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지체가 찢기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며, 신자들이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것도 용인하지 않으신다. ... 그러나 이 연합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런 교회를 꼭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